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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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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schtaria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0월 30일 (토) 23:12 판
유목민의 생활

거란(거란대자: , 거란소자: Kitai, 한국 한자: 契丹 글단)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동호계 민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투르크와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남몽골, 몽골,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연해주, 사할린에 거주하였다. 오늘날 다우르족이 거란족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1]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2]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3]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4] 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5]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거의 대부분 복속했다. 이후 거란은 돌궐과 위구르 등 유목민족들에 복속되어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을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송나라와 대립하였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금나라에게 멸망했다. 12세기 이후부터는 몽골족위구르족에 편입되었다.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2세기까지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나(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거란의 황제

칸호(汗號) 씨족 성명 재위기간
大賀 대하돌라(大賀咄羅) 619년~623년 이후
大賀 대하마회(大賀摩會) 628년
大賀 대하굴가(大賀窟哥) 648년~656년
大賀 대하아복고(大賀阿卜固) ? ~660년
무상가한(無上可汗) 大賀 이진충(李盡忠)
이진멸(李盡滅)
660년~696년
손만영(孫萬榮)
손만참(孫萬斬)
696년~697년
大賀 이실활(李失活) ? ~718년
大賀 이사고(李娑固) 718년~720년
大賀 이울간(李鬱干) 720년~723년
大賀 이돌간(李咄干) 723년~725년
大賀 이소고(李邵固) 725년~730년
와가한(窪可汗) 遙輦 요련굴렬(遙輦屈列) 730년~734년
이과절(李過折) 734년~735년
조오가한(阻午可汗) 遙輦 요련조리(遙輦俎里)
이회수(李懷秀)
735년~745년
호랄가한(胡剌可汗) 遙輦 요련해락(遙輦楷落) 746년경~755년 이후
소가한(蘇可汗) 遙輦 8세기
선질가한(鮮質可汗) 遙輦 요련습지(遙輦習之) 9세기
소고가한(昭古可汗) 遙輦 830년대
야란가한(耶瀾可汗) 遙輦 요련굴술(遙輦屈戌) 840년대
파랄가한(巴剌可汗) 遙輦 요련습이지(遙輦習爾之) 860년대
흔덕가한(痕德可汗) 遙輦 요련흠덕(遙輦欽德) ?~906년

각주

  1. Li Jinhui (2001년 8월 2일). “DNA Match Solves Ancient Mystery”. 《china.org.cn》. 
  2.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3. 김부식 (1145). 〈본기 권18 광개토왕〉. 《삼국사기》.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4. 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시라무렌강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5. 서영수, 〈廣開土王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歷史學報》 119, 1988.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 〈고구려의 北方進出과 廣開土王碑文〉,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년》, 高句麗硏究會,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