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거란(거란대자: , 거란소자: Kitai, 한국 한자: 契丹 글단)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동호계 민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투르크와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남몽골, 몽골,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연해주, 사할린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1]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2]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3] 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4]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거의 대부분 복속했다. 이후 거란은 돌궐과 위구르 등 유목민족들에 복속되어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을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송나라와 대립하였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12세기 이후부터는 몽골족과 위구르족에 편입되었다.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2세기까지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나(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참고 할만한 내용은, 거란(契丹)에서 '契' 글자를 읽은 소리가 다양한 것. 계(契)맺을, 친목 모임을 친목계라 합니다. 상(商)나라 시조 설(契)로도 읽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거란으로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거란이 동호족에서 파생됐다면, BC300년~249년 연나라 요하 침공 때, 요하 북쪽에 있는 동호와 요하 고조선을 공격해서 요하를 뺏었는데, 단군조선 = 단군(檀君)+조선(朝鮮)으로, 수도 아사달은 요하 강 상류 지역에 있는 현재 조양(朝陽)시, 조(朝)아침은 일본 말로 '아사' 언덕에 있는 동네를 한국인은 달동네라고 합니다. 상(商)나라 마지막 수도 조가(朝歌) = 은허(殷墟)유적 역시 허(墟)언덕에 있고, 첫 수도 상구(商丘) 역시 구(丘)언덕에 있습니다. 상나라 왕실 성(姓)은 자(子)아들로, 시조 설족(契族)을 화하족(華夏族) 하(夏)나라가 하대하며 무시하다 탕왕에게 망했고, 바이칼호 아래 설련하(偰輦河)에서 남하한 북방계로 보이고, 화하족 주나라에 BC1122년~BC1046년 망하는 동안, 자성(子姓)에서 파생된 기씨(箕氏) 여(餘)는 주나라 무왕이 반란 후에 감옥에서 풀어줬고, 기자(箕子)가 살던 백적(白狄) 일족을 이끌고 지역을 떠나 요하로 이동, 단군 조선이 만주에서 시작됐는데, 적(狄)오랑캐는 화하족 관점에서 자신들과 다른 이민족이란 뜻이고, 백(白)엄지는 맏형이란 뜻,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선(鮮)고울로 불렀습니다. 백(白)흰, 하얀색 옷 선(鮮)고운 선을 즐기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조선(朝鮮)은 북쪽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맥(貊)북방 종족에 해당, 예(濊)흐릴, 먼저 살고 있던 단군(檀君)과 이동해 온 기자가 요하에서 예맥, 단군조선을 시작하게 된 상황. 단군조선 수도 아사달 조양은 북방계 동호, 거란, 기자 여(餘)를 잇는 부여(扶餘) 해씨(解氏), 오녀산성 높은 지역에 세운 졸본부여 고구려(高句麗) 역시, 고(高)높을, 여(餘)일 수 있는 것은, 고구려에서 내려가 온조(溫祚)가 세운 남부여 백제 마지막 태자 성(姓) 여(餘)가 당나라에 끌려가 서(徐)로 바뀐 것을 공통 글자에서 알 수 있다. 연나라 요하 침공전까지 단군 조선은 만주에서 공존했는데, 북방계 조선은 요하를 제외한 나머지 만주 지역에서 부여를 세웠고, 기자가 아사달로 이동했을 때 단군이 자리를 내주고 이동한 곳이 요동으로, 단군은 연나라 요하 침공으로 평양으로 남하 100년 후, 위장 귀순한 위만에 평양도 뺏기고 남하 한(韓)을 세웠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단군이 시조가 되고, 부여계 온조에게 한(韓)이 망했지만, 만주 단군 조선에 한 뿌리가 있기 때문에, 단군과 기자는 조선시대까지 시조로 여기고 제사를 지냈지만, 화하족 사마천이 쓴, 사기에 적힌 몇마디에 사대주의로 폄훼, 기자는 우리 역사에서 삭제 됐습니다. 거(契)는 상나라, 조선, 부여, 고구려에서 파생된 북방계로, 상(商)나라 시조 설(契)을 거(契)로 읽는 같은 글자와 흐름에 한국인과 고대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란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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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호(汗號) | 씨족 | 성명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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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賀 | 대하돌라(大賀咄羅) | 619년~623년 이후 | |
大賀 | 대하마회(大賀摩會) | 628년경 | |
大賀 | 대하굴가(大賀窟哥) | 648년~656년경 | |
大賀 | 대하아복고(大賀阿卜固) | ? ~660년 | |
무상가한(無上可汗) | 大賀 | 이진충(李盡忠) 이진멸(李盡滅) |
660년~696년 |
孫 | 손만영(孫萬榮) 손만참(孫萬斬) |
696년~697년 | |
大賀 | 이실활(李失活) | ? ~718년 | |
大賀 | 이사고(李娑固) | 718년~720년 | |
大賀 | 이울간(李鬱干) | 720년~723년 | |
大賀 | 이돌간(李咄干) | 723년~725년 | |
大賀 | 이소고(李邵固) | 725년~730년 | |
와가한(窪可汗) | 遙輦 | 요련굴렬(遙輦屈列) | 730년~734년 |
李 | 이과절(李過折) | 734년~735년 | |
조오가한(阻午可汗) | 遙輦 | 요련조리(遙輦俎里) 이회수(李懷秀) |
735년~745년경 |
호랄가한(胡剌可汗) | 遙輦 | 요련해락(遙輦楷落) | 746년경~755년 이후 |
소가한(蘇可汗) | 遙輦 | 8세기 말 | |
선질가한(鮮質可汗) | 遙輦 | 요련습지(遙輦習之) | 9세기 초 |
소고가한(昭古可汗) | 遙輦 | 830년대 | |
야란가한(耶瀾可汗) | 遙輦 | 요련굴술(遙輦屈戌) | 840년대 |
파랄가한(巴剌可汗) | 遙輦 | 요련습이지(遙輦習爾之) | 860년대 |
흔덕가한(痕德可汗) | 遙輦 | 요련흠덕(遙輦欽德) | ?~906년 |
각주
- ↑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 ↑ 김부식 (1145). 〈본기 권18 광개토왕〉. 《삼국사기》.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 ↑ 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시라무렌강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 서영수, 〈廣開土王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歷史學報》 119, 1988.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 〈고구려의 北方進出과 廣開土王碑文〉,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년》, 高句麗硏究會,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