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폰 나사우
아돌프 폰 나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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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왕 (공식적으론 로마인의 왕) | |
재위 | 1292년 5월 5일 – 1298년 6월 23일 |
대관식 | 1292년 6월 24일 아헨 대성당 |
전임 | 루돌프 1세 |
후임 | 알브레히트 1세 |
나사우 백작 | |
재위 | 1276년 경 – 1298년 7월 2일 |
전임 | 발람 2세 |
후임 | 루프레히트 6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55년 |
사망일 | 1298년 7월 2일 (43세) |
사망지 | 괼하임 |
가문 | 나사우 가문 |
부친 | 발람 2세 |
모친 | 카체넬른보겐의 아델하이트 |
배우자 | 이마기나 폰 이젠부르크림부르크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묘소 | 슈파이어 대성당 |
서명 |
아돌프 폰 나사우(Adolf von Nassau, 1250년년경 ~ 1298년 7월 2일)는 1276년경부터 군림한 나사우 백작이며, 1292년에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어 재위하다 1298년 선제후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 제관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황제 직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건강했던 최초의 신성 로마 제국 통치자로, 심지어는 교황의 파문 없는 데도 폐위당한 최초 인물이기도 하다. 아돌프는 후임자인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에 대항하여 괼하임 전투에 교전하던 도중 전사했다.
그는 로마-독일 군주 작위를 두고 경쟁하던 귀족 가문들의 이른 바, 백작왕(Grafenkönige)의 두 번째 사례였다.
가문
아돌프는 독일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던 백작이었다. 그는 1255년경에 태어났고 나사우 백작 발람 2세와 카체넬른보겐의 아델하이트의 아들이었다. 아돌프의 형제는 나사우의 디터로, 1300년에 트리어 대주교로 임명됐다.
아돌프는 1270년에 이젠부르크-림부르크의 이마기나 (1313년 이후 사망)와 혼인하여 자녀 여덟을 두었다. 이마기나의 자매인 이젠부르크-림부르크의 아그네스는 쾰른 대주교 베스터부르크의 지그프리트 2세의 형제인 베스터부르크의 하인리히와 혼인했다.
나사우 백작 시절
1276년 혹은 1277년에, 아돌프는 아버지의 나사우 백작 자리를 이어받았다. 아버지한테서, 그는 타우누스산맥의 란강 남쪽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상속했다. 여기에는 비스바덴, 이트슈타인을 영지로 포함했고, 보름스 주교구 하에 있던 바일부르크의 폭트령도 있었다. 또한 그는 나사우와 라우렌부르크 성 인근 가문의 본거지 소유권도 공유했다.
1280년경에, 아돌프는 엡슈타인 영주들과 나사우-엡슈타인 원한 관계가 되는데, 이 사태 중에 비스바덴이 초토화되었고 조넨베르크 성은 파괴되었다. 이 원한 관계는 1283년에 해결되는데, 이후에 비스바덴 및 조넨베르크 성이 재건되었다. 이트슈타인과 함께 조넨베르크가 아돌프의 거처가 되었다. 그는 1287년 이트슈타인에 도시 특권을 부여하고 요새 시설을 건설했다.
숙부인 카체넬른보겐의 에버하르트 1세를 통해 아돌프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국왕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 루돌프는 그에게 베츨라어 지역의 칼스문트 성에 대한 소유권을 수여했고 1년 뒤에는 카우프 인근 구텐펠스 성 (이곳을 통해 그는 라인 궁정백의 가신이 되었다)도 수여했다.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기 이전, 아돌프의 정치적 활동들은 쾰른 대주교의 우방(Bundesgenosse)이라는 역할로 제한되었었다. 아돌프는 특정한 직위가 없었으나, 미틀라인과 마인츠 지역 내 정치적 문제 면에서 쾰른과 마인츠 대주교들과 같이 개입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구사했는데, 이는 당시 귀족들한테 있어서 드문 경우였다.
선출된 뒤로, 나사우의 아돌프는 정부를 자신의 거처로 옮기는등, 독일에서 드문 경우였다. 1294년 1월 17일에, 그는 보름스 주교구에서 400 파운드에 바일부르크를 매입했다. 그는 1295년에 바일부르크에 도시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또한 1296년 바스바덴 인근에 글라라 수녀회 소속의 클라렌탈 대수도원을 세웠다.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1291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기 오래 전부터, 루돌프는 장자인 알브레히트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선출을 확실히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는 쾰른 대주교 베스터부르크의 지그프리트 2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벤첼/벤체슬라우스) 2세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궁정백 오버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만이 알브레히트를 선출하기로 약조했을 뿐이었다. 루돌프가 그의 선출권을 공인해줬음에도, 바츨라프는 알브레히트를 지지하는 걸 거부했는데, 알브레히트가 그에게 케른텐을 양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핵심 지역인 슈바벤에서 귀족들의 편을 들었고 이런 방식으로 알브레히트가 인기가 없던 오스트리아 지역을 획득했다. 바츨라프는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의 지지를 받았는데, 니더바이에른 공작가는 합스부르크가의 전통적 적대 세력이었다.[1] 바츨라프는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선제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내어,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2세는 바츨라프와 동일한 선거권을 행사하기로 1291년 11월 29일에 약조 협정을 맺었고, 브란덴부르크의 오토 4세도 동일한 약조를 맺었다.
대주교 지그프리트는 신성 로마 황제는 제위라는 것을 아버지한테서 상속 재산으로서 받으면 안 되며, 선제후들로부터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인츠 대주교 엡슈타인의 게라르트 2세에게 자신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왕을 선출하자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게가르트는 신임 트리어 대주교 보헤문트 1세를 설득했다. 이러자 궁정백은 선제후들의 대다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그프리트는 그 결과 선제후들에게 나사우의 아돌프를 왕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그가 선제후들에게 광범위한 양보를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따른다면 그를 선출하기로 했다.
선출되기 며칠을 앞둔, 1292년 4월 27일에, 선제후들 중에 처음으로 지그프리트 대주교는 아돌프가 왕으로 선출되는 데 있어 아돌프가 소유권 인정 (제국 자유 도시들인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보크트령 에센 등을 포함), 제국 도시들과 성, 그리고 은화 총 25,000 마르크 등을 담보로 잡는 등 여러 항목들을 약조하기로 한 안더나흐 조약을 공표했다. 추가적으로, 아돌프는 분명하게 명단에 오른 반대자들에 대해 지원을 약속했지만, 지그프리드 2세의 적을 자문회에 들이지 않겠다는 보편적 약속도 하였다. 선출된 이후에, 아돌프는 약조 이행을 위해 대주교에게 충분한 담보물을 제공해야만 했으며 그렇지 않다면 왕위를 잃을 수 있었다. 마지막 사항은 13세기 말에 그의 집권을 구성하는 순간으로서 대관식이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아돌프는 합의된 담보물을 마련한 후에야 대주교에게 먼저 대관식을 요청하기로 약속했다.
각주
- ↑ Herde 2000, 515-5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