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의 거병 때부터 함께해 고조가 한왕이 되고서는 후작에 봉해졌고, 삼진 평정에 함께했다.[1]팽성 전투에서는 하읍에 주둔하여 패주하는 고조를 맞이했다.[1][2][3] 이외에도 고조의 중국 통일에 공헌하여 고조 6년(기원전 201년)에 주여후에 봉해졌고, 3년 후 고조 9년(기원전 198년)에 죽어 시호로 영무(令武)를 받았다. 아들 여태가 여(呂)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죽으면서 자신도 여나라의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증되었다.[1] 고조의 공신들 중 풍무택·정복·곽몽·충달·곽정은 고조의 중국 통일전 중에 여택의 배하에서 공을 세웠다.[4]
고조가 자신의 생질 태자 유영 대신 유여의에게 태자를 정하려 하자, 누이 여후와 함께 의논하고 장량을 협박해 유영을 위해 계책을 내게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기록된 사기의 유후세가와 한서의 장진왕주전에서는 자기 작호인 주여후가 아닌, 아우 여석지의 작호인 '건성후'로 나온다.[5][6] 이 때문에 이 부분의 여택은 여석지를 잘못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