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비 조씨
덕비 조씨
德妃 趙氏 | |
---|---|
고려 우왕의 후궁 | |
이름 | |
휘 | 봉가이(鳳加伊) |
별호 | 숙녕옹주(肅寧翁主), 헌비(憲妃)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
부친 | 조영길 |
모친 | 이인임의 여종 |
배우자 | 우왕 |
자녀 | 없음 |
덕비 조씨(德妃 趙氏, 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의 제7비이다.
생애
[편집]가계와 왕비 책봉
[편집]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1]. 조영길의 딸로, 이름은 봉가이(鳳加伊)이다. 조영길은 원래 당대의 권신 이인임의 여종의 남편이었는데, 1384년(우왕 10년) 음력 6월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갔다가 봉가이를 알게 되어 통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조영길은 말을 하사받고 전농부정에 제수되었다[2]. 이후 우왕과 봉가이는 매일같이 교외로 놀러다니기를 반복하였다[3].
원래 고려에는 천자수모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그 자식도 역시 노비의 신분이었다. 따라서 봉가이 역시 이인임의 노비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덕비를 맞이한 후 이인임을 부모의 예로 대하고, 이인임도 우왕을 사위의 예로 대했다고 전한다[4].
왕비 시절
[편집]1384년(우왕 10년) 음력 11월, 용덕(훗날의 숙비 최씨)이 봉가이를 무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 용덕은 “평리 도길부가 봉가이와 통정하였다.”라는 내용으로 참소하였다. 용덕은 원래 의비 노씨(우왕의 제3비)의 궁인으로 있다가 우왕의 총애를 얻어 숙비에 책봉되었는데, 이때 봉가이가 유독 우왕의 총애를 받자 이를 질투하여 이러한 무고를 한 것이었다. 우왕은 도길부를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좌천시켰다.
이후 1385년(우왕 11년) 음력 12월 숙녕옹주(肅寧翁主)에 책봉되었다. 이날 왕비에 책봉된 이는 봉가이 말고도 기생 출신의 칠점선(영선옹주)도 있었는데, 개인의 노비나 기생이 왕비에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5] 한편 숙녕옹주에 책봉된 봉가이는 1386년(우왕 12년) 음력 8월 헌비(憲妃)에 책봉되었고, 그녀를 위해 숙녕부(肅寧府)가 설치되었다[6]. 이후 1387년(우왕 13년) 음력 9월 헌비에서 덕비(德妃)로 개봉되었다[7].
봉가이가 숙녕옹주로 책봉된 다음달인 1386년 음력 1월에는 우왕이 봉가이에게 줄 주옥 장식이 없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며 보원고의 관리들을 하옥시켰고[8], 같은 달에는 전공판서 권주의 집을 수리하여 봉가이에게 주었는데[9], 숙녕옹주가 새 거처로 이사를 할 때에는 우왕이 친히 나서서 그 이사를 도와주었다[10].
한편 1386년 음력 2월, 봉가이는 2년 전 자신을 무고했던 용덕을 무고[11] 하였다. 이때 봉가이는 “용덕이 그 어미와 함께 미도[12]를 끼고 현혹시키는 짓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안그래도 당시 용덕에게 애정이 식었던 우왕은 크게 화내며 곧바로 용덕을 숙비의 자리에서 폐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고 용덕의 궁인들을 모두 가두었다. 결국 다음달인 음력 3월 용덕과 최천검은 전주로 귀양을 가고, 그 어미와 시종들은 사형당하였다. 당시 임견미, 이성림, 염흥방 등이 용덕과 그 가족을 애석하게 여기고 도우려 했지만 실패하였다[13].
그러나 1386년 음력 6월 봉가이는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14].
우왕 폐위 후
[편집]1388년(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창왕의 모후 근비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내쫓겼다[15]. 사가로 내쫓긴 이후의 봉가이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호는 덕비(德妃)이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 조영길이 1388년 음력 11월 개경에 몰래 들어왔다가 들켜 장형에 처해지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16].
한편 우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어 《고려사》의 〈세가〉에 오르지 못하고 〈열전〉반역 편에 수록되었고, 우왕의 왕비들 역시 《고려사》〈열전〉에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4].
가족 관계
[편집]출처
[편집]- ↑ 네이버 백과사전 〈구비삼옹주〉항목[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고려사》권135〈열전〉권48 - 우왕 10년 6월 - 왕이 조영길의 딸 봉가이와 통정하고 총애하다
- ↑ 《고려사》권135〈열전〉권48 - 우왕 10년 8월 - 왕이 봉가이 등과 함께 매일 교외로 놀러다니다
- ↑ 가 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덕비〉항목
- ↑ 《고려사》권135〈열전〉권48 - 우왕 11년 12월 - 사비와 관기를 전례없이 옹주로 봉하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8월 - 숙녕옹주를 헌비로 높여 책봉하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3년 9월 - 헌비를 덕비로 고쳐 봉하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1월 - 숙녕옹주에게 줄 주옥장이 없자 보원고 관리를 하옥하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1월 - 권주의 집을 수리해 숙녕옹주에게 주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2월 - 우왕이 숙녕옹주의 이사를 도와주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2월 - 숙비를 폐출하고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다
- ↑ 媚道. 뇌물이나 미인계를 써서 남자의 환심을 사는 것을 말한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3월 - 숙비와 최천검을 유배보내고 어머니 등을 죽이다
- ↑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6월 - 숙녕옹주가 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기를 간언하다
- ↑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6월 - 왕의 어머니 근비를 왕대비로 높여 책봉하고 전 왕의 왕비와 옹주를 모두 쫓아내다
- ↑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11월 - 조영길을 장형에 처하고 유배보내다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