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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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黃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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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이 그린 황현의 초상화 | |
조선국 전라도 구례 관청 동몽교관 (朝鮮國 全羅道 求禮 官廳 童蒙敎官) | |
임기 | 1890년 2월 1일 ~ 1891년 2월 1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이름 | |
별명 | 자(字)는 운경(雲卿) 호(號)는 매천(梅泉)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55년 12월 11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광양군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시) |
사망일 | 1910년 9월 7일 | (54세)
사망지 |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구례군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구례군) |
학력 | 1888년 생원시 복시에 장원 급제 |
경력 | 유학자, 시인, 문장가, 역사 저술가 |
정당 | 무소속 |
부모 | 황시묵(부) 풍천 노씨(모) |
형제자매 | 황원(아우) |
친인척 | 황기주(6촌 아우) 황의돈(재종질) 황윤석(삼종손녀) |
종교 | 유교(성리학) |
상훈 |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
황현(黃玹, 1855년 12월 11일 ~ 1910년 9월 7일)은 대한제국 조선 왕조 말기의 선비로 시인, 문장가, 역사가, 우국지사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다.
생애
[편집]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梅泉)이다. 사학자 황의돈(黃義敦)은 그의 7촌 재종질이다. 그는 전라도 광양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전라도 함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전라도 구례에서 성장했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였다.[1]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지내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 체결 16일 후 구례군 자택에서 음독 자살했다[2].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장지연(張志淵)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에 실렸고, 이는 경남일보 필화 사건의 원인이 됐다.
과거 급제
[편집]사후
[편집]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전남 구례군 황현의 집터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 그리고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다.
저서
[편집]같이 보기
[편집]외부 링크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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